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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자유를 찾아 역이주한 흑인 노예들, 시에라리온에서 이날치 밴드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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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
"빵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
 
전자는 미국의 독립운동가였던 패트릭 헨리(Patrick Henry)가 영국의 식민지배를 거부하며 외쳤던 말입니다. 1776년, 미국은 영국과의 독립전쟁에서 승리하며 그토록 원하던 독립과 자유를 얻었습니다. 
 
"빵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 이 말은 1789년 프랑스 대혁명 당시, 빵 평등권을 요구하며 외쳤던 구호입니다. 당시 프랑스에서는 신분에 따라 다른 빵을 먹어야 했습니다. 귀족들은 흰색의 부드러운 빵을 먹었으나, 가난한 하층민들은 호밀로 된 검고 딱딱한 빵을 먹어야 했던 것입니다.

결국 빵 평등권은 구현되었고, 이때 만들어진 빵이 바로 바게뜨(Baguette)입니다.

 
위의 두 구호는 민주주의의 핵심가치인 자유와 평등을 요구하는 처절한 외침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그 누구보다 이 자유와 평등을 갈구하고 필요로 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흑인 노예들입니다. 
 
노예제도가 공식 폐지된 것은 영국의 경우 1834년이었으며, 미국은 1865년입니다. 그런데 노예제 폐지에 앞서 해방된 흑인 노예들이 존재했고, 노예제 폐지주의자(Abolitionist)들은 이들을 서아프리카의 시에라리온(Siera Leone)과 라이베리아(Liberia)에 역이주시키고자 노력하였습니다. 
 

흑인 노예들, 고향 앞으로!  

미국 독립전쟁(1775~1783년) 당시 자유와 토지를 약속 받고 영국 편에 섰던 흑인 노예들은 전쟁 후 영국으로 이주하거나, 캐나다의 Nova Scotia에 정착하였습니다.

이들은 새로운 땅에서 자유를 얻었으나, 영국 정부로부터 제대로 된 지원을 받지 못하였고, 인종차별과 가난 등 고통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이에 영국의 폐지주의자들과 흑인 정치인 등은 이들을 아프리카로 역이주 시키려 하였으며, 이때 그들이 선택한 땅이 바로 지금의 시에라리온입니다. 

 
그랜빌 샤프(Granville Sharp) 등 폐지주의자들은 "Committee for the Relief of the Black Poor"라는 조직을 결성하여 흑인들의 시에라리온 이주를 추진하였습니다.

샤프는 시에라리온 해변 땅을 원주민으로부터 매입하여 정착촌을 만들었고, 드디어 1787년 흑인과 일부 백인 400여 명을 이곳으로 이주시켰습니다. 이 정착촌의 이름은 그의 이름을 따 그랜빌 타운이라 불렀는데, 그랜빌 타운은 세계 최초의 흑인 해방노예 정착촌이 되었습니다. 

Granville Sharp와 당시의 프리타운 이미지 출처. 위키피디아

 
하지만 안타깝고 어이 없게도 그랜빌 타운은 결국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말라리아 등 풍토병에 의해 다수가 사망했고, 원주민에게 붙잡혀 다시 노예가 되는 사람도 발생했습니다. 척박한 땅에서 마땅한 생계수단이 없다 보니 생존의 문제에 직면하게 되면서, 일부는 정착촌을 벗어나 흑인 노예상으로 흑화하기도 하였습니다.

수많은 사건들 속에 그랜빌 타운은 결국 1789년 방화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이후 부유한 흑인이었던 클라인(Emmanuel Kline)이 그랜빌 타운을 인수하였고, 1791년 Cline Town이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그랜빌 타운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영국 폐지주의자들은 계속해서 역이주를 추진하였고, 1792년 새로운 이주가 이루어졌습니다. 이번 이민자들은 캐나다 Nova Scotia에 정착한 흑인들이었는데, 약속된 토지와 지원을 받지 못한 이들은 새로운 희망을 안고 시에라리온 이주에 지원하였습니다.

1,100여 명의 인원이 지원하였고, 1792년 그랜빌 타운의 자리에 프리타운이 건설되었습니다. 이후 영국에 의한 재식민지화 등 많은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1961년 자유의 시에라리온이 탄생되었습니다. 

 
한편, 미국에서는 미국 식민협회(American Colonization Society)가 주도하여 미국 흑인들을 역이주 시켰는데, 이들이 선택한 곳은 시에라리온 바로 아래에 있는 땅인 라이베리아였습니다. 라이베리아에 정착한 미국 흑인들은 1847년 라이베리아 공화국을 설립하였으며, 이는 아프리카에 만들어진 첫번째 공화국이 되었습니다.  

저는 시에라리온과 라이베리아를 모두 방문해 보았는데요, 오늘은 시에라리온의 프리타운 방문기를 적어 보겠습니다.
 

사진 오른쪽은 라이베리아의 국장(National Emblem)입니다. "자유에 대한 사랑이 우리를 이곳으로 이끌었다"라는 문구가 당시 역이주 흑인 노예들의 심정을 직설적으로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비행기 타고, 버스 타고, 배 타고 가야 하는 프리타운(Freetown)

프리타운은 시에라리온의 수도입니다. 그런데 프리타운에 가기 위해서는 비행기도 타고, 버스도 타고, 배도 타야 합니다. 복잡해 보이지만, 새로운 경험이라 오히려 재미 있었습니다.

우선, 비행기를 타고 프리타운 바다 건너에 있는 프리타운 국제공항(FNA)에 도착해야 합니다. 이름은 프리타운 국제공항입니다만, 위치는 프리타운에 있지 않습니다. 프리타운 바다 건너에 있는 런지타운(Lungi Town)에 있습니다.

입국 수속을 마쳤으면, 선착장으로 배를 타러 가야 합니다. 선착장 이름은 펠리컨 선착장인데, 봉고 버스를 타고 조금만 가면 바로 도착할 수 있습니다. 이제 선착장에서 대서양을 바라 보며 배가 오길 기다리면 됩니다. 해변에서 선착장까지는 나무로 된 다리로 연결되어 있는데, 좀 위험해 보이기도 하고, 꽤 운치가 있어 보이기도 했습니다. 
 
배는 생각보다 좋습니다. 단층짜리 쾌속선인데, 예전에는 나무로 만든 배를 타고 갔다 합니다. 앉은 자리 바로 옆에서 출렁이는 대서양 파도를 보며, 30분 정도 가면 드디어 자유의 땅, 프리타운에 도착합니다.

하늘에서 본 시에라리온
프리타운 국제공항
프리타운 국제공항
펠리컨 선착장
배를 타러 가는 다리
배를 타러 가는 다리
프리타운으로 가는 여객선. 내부가 현대적이고 깨끗합니다.
프리타운에 도착하여 배 위에서 찍은 프리타운의 모습

 

프리타운 이모저모

우기에 도착한 프리타운은 맑고 깨끗했으며, 녹색이 풍부하였습니다. 자연적인 느낌이 강한 항구였으며, 규모는 작은 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곳이 서아프리카에서는 제일 크고, 세계에서는 세번째로 큰 천연항구라 합니다. 항구 주변은 평화로웠고, 바다에 떠 있는 배들은 여유롭게 휴양을 즐기는 모습이었습니다. 한 가지 이색적인 것은 배에서 전력을 생산하는 전력선(Powership)의 모습이었습니다. 
 
프리타운은 다른 서아프리카 도시들과 달리 산과 언덕 길이 제법 많이 보였으며, 평지는 물론 산 꼭대기까지 빼곡이 들어선 집들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밀집된 건물들 사이로 고풍스러운 영국식 교회와 건물이 눈에 들어 왔고, 시내 중심지에는 프리타운의 상징인 Cotton Tree가 1792년 프리타운의 설립을 증언하듯 서 있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 나무는 2023년 폭풍우에 의해 밑동을 제외한 윗부분이 모두 꺾여 버리고 말았습니다......
 
대서양에 접한 해변가에는 프리타운에 어울리지 않는 매우 현대적인 빌딩이 우뚝 솟아 있습니다. 15층 높이의 프리타운 시청 건물인데요, 이 건물은 우리의 대외경제 협력기금(EDCF) 지원을 통해 건설되었습니다. 이전의 구청사는 북한의 경제지원에 의해 건설되었으나, 내전으로 인해 소실되었다 합니다. 저는 이곳의 옥상까지 올라 가 보았는데요, 옥상에서 바라보면 프리타운 시내가 한 눈에 들어 옵니다.
 

프리타운 시청
시청 바로 옆에 있는 영국 교회. 시에라리온 인구의 80%는 무슬림입니다.
시청 옥상에 바라 본 시내 풍경
산 꼭대기까지 들어 찬 집들
시청 건물에서 바라 본 바닷가 풍경
대서양 해변 풍경
잔잔한 물결과 배
전력을 만드는 전력선(Powership)
교복을 입은 학생들
거리 풍경
바닷가의 석양
벤츠 전시장이 있는 풍경
프리타운의 상징인 Cotton Tree. 왼쪽은 2022년 제가 방문하여 찍은 사진입니다. 오른쪽은 2023년 사진입니다(출처 Xinhua).

 

우리와의 관계

제가 방문했던 2022년은 양국 수교 60주년이 되는 해였습니다. 이를 축하하기 위해 다양한 행사가 펼쳐졌었는데요, 저도 시에라리온에 거주하는 교민 및 기업인과 함께 참석을 하였습니다.

교민들은 대략 40여 명 정도라 하는데, 이곳에도 작지만 한국식당이 있었습니다. 식당 간판에 중국어를 병기해 놓은 것으로 보아, 중국 손님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이 축하행사 기간 동안 2가지가 특별했었는데요, 하나는 대한민국 명예영사 임명식이었습니다. 현재 시에라리온에는 우리 대사관이 없는 상황입니다. 나이지리아 대사관에서 관리 중이라 명예영사를 통해 양국간 교류를 더욱 증진하고자 하는 모습입니다. 명예영사로 임명된 사람은 이곳에서 플라스틱 가공과 팜오일 사업을 하는 인도인 사업가입니다.


서아프리카에는 이 분과 같은 인도인 사업가들이 많이 있습니다. 물자가 부족한 아프리카에 각종 물자를 조달하고 직접 판매하는 사업을 주로 하는데, 그 규모가 상당히 큽니다.

또 하나 특별했던 이벤트는 이 먼 곳까지 우리 가수들이 공연을 왔다는 점입니다. 산 넘고 물 건너 이곳에 온 우리 공연단은 "이날치 밴드"였습니다. 한국에서도 접하지 못했던 그들의 음악을 이곳에서 접하게 되어 반갑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였습니다.
 
더욱 고마웠던 것은 공연이 불가능할 수도 있었던 상황을 극복하고 최선을 다해 공연을 했다는 점입니다. 공연에 필요한 짐이 도착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들은 제대로 된 의상, 분장 없이 공연을 해야 했는데, 그들만의 독특하고 개성 넘치는 소리와 춤, 무대 매너에 프리타운 시민들이 큰 호응을 보내 주었습니다. 
 
시에라리온은 다이아몬드로 유명합니다. 하지만 이로 인해 엄청난 비극을 겪었는데요, 앞으로는 다이아몬드보다 더 빛나는 나라가 되길 바래 봅니다.

이날치 밴드 공연, 출처 KOCIS
프리타운의 한국 식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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